올해 칠순을 맞은 아내와 저녁 식사를 일찍 마치고 공원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던 도중에 느닷없이 아내가 43년 전 옛 얘기를 꺼냈다.
“영주에서 수원으로 이사 올 때 너무 힘들었어요.” 나는 아내를 쳐다보며 “뭐가 힘들었어?”라고 물었다. “철공장 사장에게 20만 원을 빌려주었던 것 기억나요?” 나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다가 대답했다. “응, 맞아, 기억나네, 이사할 때 못 받아서 당신 너무 마음 아파했었지.”
그때 사연은 이러했다. 당시 나의 월급은 약 2만 원 정도로 박봉이었다. 그러나 내가 퇴근 후 속주머니에서 월급봉투를 꺼내줄 때면 아내는 항상 기쁜 표정으로 나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행복했다. 월급봉투는 항상 아내가 맡아 관리하였다. 그 돈으로 한 달 동안 빚 안지고 살림을 해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검소함과 근면함이 몸에 밴 아내는 알뜰함과 지혜로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같은 동네 철공장 사장 부인에게 20만 원을 빌려주었다는 것이다. 사연을 들어보니 너무 불쌍했기에 꿔준 것이었다. 서너 달만 쓰고 갚되 이자도 준다고 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고 귀가 얇았던 아내는 동정하는 마음에 차용증도 없이 선뜻 빌려준 것이었다.
그 돈은 결혼 후 3년 동안 아내가 온갖 살림 비용을 줄여가며 장래를 위하여 내게도 몰래 은밀히 저축한 것이었다. 그때 20만 원은 실로 2만 원 봉급자에겐 매우 큰돈이었고 목숨 같은 돈이었다. 나는 순간 의구심이 들었지만,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으니 잘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공장으로부터 이자를 한차례 받은 후부터 문제가 생겼다. 몇 달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이웃 사람들에게 알아보니 부도가 나서 망했다고 했다. 아내는 초조함에 아이를 등에 업고 공장을 찾아갔다. 부도가 나서 망했으니 얼마나 딱할까 생각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대문을 들어섰다.
그러나 깜짝 놀랐다. 아내의 눈엔 그들이 망한 사람들 같지 않았다. 우리 식구들은 감히 먹어보지도 못한 수박과 바나나 껍질 그리고 빈 맥주병이 마당에 수북했다. 조심스럽게 방문 밖에서 인기척을 하니, 사장 내외가 귀찮아하며 마지못해 나왔다. 돈 얘기를 꺼내니 부인은 미안한 표정이었으나 남편은 깡통을 걷어차고 욕을 해대며 오히려 난동을 부려댔다.
“그까짓 돈! 에이 더러워!”라고 하며 욕설을 퍼부어 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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